창작 글

테라스_1

 비가 내렸다.

조용한 빗소리도 비바람이 테라스 처마 끝에 있는 방울을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흰색 테이블에 놓인 두 잔의 커피 위로 조용히 재즈가 흘러 지나간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훑으며 컵을 들었다 놓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어머니는 무척 고약한 여자였어."

 

 남자의 말은 텅 빈 길거리를 헤맸다.

담담했던 그의 언행과 달리 고개는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저는 무척 고약한 사람을 좋아한답니다."

 

 잔을 조용히 애무하는 남자의 손과 달랐다.

그녀의 손가락은 곧고 창백했으며 그의 손과 달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완수했다.

한 모금의 커피를 머금은 여자는 한참 뒤에야 삼키고 남자를 바라봤다.

 

"고약한 사람은 다양한 사연이 있어요.

드라마는 실제 이야기의 발끝도 미치지 못한답니다."

 

 커피를 내려놓은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나를 때리거나 굶기지 않으셨어.

오히려 풍족하게 키우셨지."

 

 그의 입이 트였다.

 

"무언가를 사달라하면 하루, 이틀 뒤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부엌 식탁 위에 놓인 봉투에서 돈을 쓰면 돼.

그게 저녁 밥값이었거든."

 

"어느날은 시계가 무척 갖고 싶었어.

사달라고 하기에는 좀 비싸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는 1,2만원씩 몰래 가졌지.

물론, 엄마는 그 시계가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불안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평온해졌다.

그는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는 그 위에 손을 깍지를 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빠를 죽였어."

 

 그의 말은 무겁게 전해졌다.

남자는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여자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아빠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잘못한 게 있으면 나무 뭉둥이로 허벅지를 때리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한테 관심을 주고, 내 말을 들어줬어."

 

"아빠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서 일하느라 가방 끈이 짧으셨지.

애초에 공부랑 연이 없으셨던 건지, 학교 공부를 물어보면 제대로 답해주지 못하셨어."

 

 잔을 들어올린 남자는 식은 커피를 마셨다.

입과 컵은 맞댄 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잔에 가려진 남자의 입술이 보이는 것처럼 조용히 주시했다.

 

"수학을 못하셨지.

단지 100을 곱하기만 하면 됐던 문제를 몰라서

나랑 아빠는 30분 넘게 고민했어.

좋은 부모는 아니었지만, 나쁜 것도 아니었지."

 

 잔에서 천천히 입을 떼어낸 그는 길 건너편의 화분을 바라보았다.

대로변에 배치된 화분은 시든 빨간 꽃을 담은 채 일정 간격으로 놓여져 있었다.

남자의 시선과 이어진 화분만은 비어 있었고, 물이 주둥이 끝까지 가득 차 넘칠 듯했다.

 

"그러다 이혼하셨어.

어머니는 아빠가 바람피었다고 하지만, 모르겠어.

나이먹고 그걸 묻기도 전에 아빠는 돌아가셨거든."

 

 남자는 커피 한 모금 한 후, 말을 이었다.

 

"유서에는 재산을 모두 어머니에게 준다는 내용이였어.

아빠는 우리랑 살 때 트럭 운송업을 하셨거든.

어렸을 때라 뭘 배달하신 건지 정확히 몰랐지만,

어쨌든 아빠가 남겨둔 돈은 꽤 컸어."

 

"이혼하고 돌아가시기까지 1년도 안 걸렸는데 말이야."

 

"좋으셨나요? 아니면 슬프셨나요."

 

 남자가 말을 끝내고 숨을 고르는 사이, 그녀의 물음이 던져졌다.

그는 고민할 틈도 없이 답하였다.

 

"별 생각 안 들었어.

시험 기간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

 

"애정이 없으셨군요."

 

"돌아가신 후, 시간이 지나서야 애정이 생겼어.

그때는 실수하면 아빠한테 몽둥이로 맞는다란 생각만 나서

무섭기만 했거든."

 

 남자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자의 눈은 웃었다.

 

"3년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엄마가 아빠를 죽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더라고."

 

 그는 여자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턱을 괸 채 시선만 마주쳤을 뿐이었다.

 

"아빠의 죽음은 이상했어.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으셨거든.

근데 그걸 신고한 건 엄마였고."

 

"경찰은 부모님의 이혼 과정과 유서의 상속 내용, 그리고 사망보험금을 이유로

엄마를 용의자로 지목하셨지."

 

"사망보험금까지. 저라도 의심했을 거예요."

 

"그래.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만

건너편 아파트에서 아빠가 혼자 떨어졌다는 증언들이 쏟아졌지.

덕분에 사망보험금과 아빠의 재산은 쉽게 받을 수 있었어."

 

"그렇다면 왜 어머니를 의심하는 거죠?"

 

 그녀는 느릿한 손짓으로 빈 잔의 입구를 쓸었다.

 

"아빠는 죽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사망보험금을 제외하더라도 재산은 많았어.

그정도였다면 불륜녀의 흔적이 있어야 했는데, 없었어.

아무것도."

 

"사진도, 핸드폰 기록도.

우리 가족 관련된 것들만 한가득이었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라고는?"

 

"그렇게 꼼꼼한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여자를 만나면 당연히 지출이 생겨."

 

"그렇죠. 이 커피도 당신이 사는 거니까."

 

 남자가 콧방귀를 뀌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여자의 입가에 있는 점이 매우 돋보였다.

 

"아빠의 지출은 깨끗했어.

월세를 내고, 공과금은 밀린 적 없었지.

옷도 사지 않고 그대로였어.

단지 안 먹던 소주병과 장을 본 영수증, 그게 끝이야."

 

"아빠의 재산을 상속받은 후, 엄마는 편하게 놀러다녔어.

이혼 전과는 달리 너무 활발히 움직이셨지.

새아빠가 될 뻔한 사람을 소개한 적이 열 번도 넘으니."

 

"스타일은 일관적이었나요? 아니면 새로운?"

 

"사람 취향이란 게 그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덕분에 편견이 사라졌지."

 

 그의 말에 그녀는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작고 우아한 웃음소리가 남자의 귀를 멤돌았다.

 

"그리고 술을 자주 드셨어.

소주부터 양주, 위스키, 이름 모를 비싸보이는 술까지.

대학생 무렵에는 같이 마시는 경우도 종종 생겼지."

 

"아빠와 달리 엄마에게는 애정이 있었나봐요?"

 

"아니, 그냥 비싼 술 공짜로 먹을 수 있으니까.

집이 잘 살아도 그런 술은 마음대로 못 먹거든."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본 남자는 말을 이었다.

 

"같이 마신지 두 세달 정도 됐을 무렵이었나.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고.

내 위로 잃어버린 형이 있다고."

 

 그의 눈은 또렷해져갔다.

 

"이름 모를 그 형을 찾고 싶어하셨지.

내가 아니라 첫째랑 술을 마시고 싶고,

그 똘망한 눈이 커가는 걸 지켜보고 싶다고."

 

"그제서야 깨달았지.

왜 나를 방치했고, 관심이 없었는지."

 

"이제야 묻는 거지만,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죠?"

 

 뮤지컬을 관람하듯, 그녀의 표정에는 흥미와 궁금증 그리고 신남이 묻어있었다.

 

"두분 다 첫 혼이었어.

첫 아이를 잃어버린 후 나를 낳으신 거였어.

이것도 추측이지만, 아마 대용품 쯤으로 보셨던 거 같아."

 

"처음에는 충격이었지.

사생아도 아니고,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였으니까.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를 동정했어.

이름 모를 내 형을 위해 처음으로 기도하기도 했고."

 

"그게 시발점이었지.

엄마와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리운 감정이 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는 속도는 무척 빨랐어."

 

"술자리에서만 묵히던 이야기가 맨정신일 때도 들렸을 때,

아빠한테 맞는 것보다 더한 공포로 다가왔지."

 

"그러다 기말고사 시험을 보는데, 시험지에 이런 글이 보였어.

'너가 아니라 네 형이 있어야 했다고.'

그때 깨달았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상황파악이 빠르시네요.

보통 자존감이 내려가거나 우울증이 도져서

의존형이 되거나 폐인이 되기 일쑤인데."

 

"예전에 마마보이였어.

그런데 어머니가 없으니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

그때부터 무기력한 게 싫어서 혼자하는 버릇을 들였어.

더불어 욕 안 먹으려고 자기객관화도 꾸준히 했지."

 

"그래서 어머니한테 말했어.

독립하게 지원해 달라고.

그 뒤로 집을 나왔지."

 

"어머니가 순순히 지원해 주시던가요?"

 

"별 말 없이 했어.

저 말을 한 후, 두 달만에 집을 구해주셨지.

재밌는게 뭔지 알아?"

 

 여자는 의례적으로 고개를 흔들고는 카페 유리창 너머에서 핸드폰을 하는 점원을 바라보았다.

 

"학교가 집과 거리가 멀지 않았어.

재력도 있는 편이었고.

그러면 부모는 보통 학교와 집 사이에 자취방을 구해줄법한데,"

 

"어머니는 집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구해주셨어.

그리고 헤어질 때 걱정아닌 걱정을 하시더라고."

 

"'학교 생활 힘들테니, 졸업 전까지는 오지 말라고.'"

 

"그 뒤로 집은 한 번도 들리지 않았지."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1개의 댓글

12 일 전

이거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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