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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방문한 김구가 한독당 옥구지구 청년단장에게 준 글귀

https://youtu.be/3xDZjresbZs?si=9vaIvaM4gMI26_1x

 

1948년 12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축하하면서도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부정했던 김구는 1949년 국면 들어서 남북한 정부 양쪽 모두에 반대하는 남북협상 노선을 수정하고(다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림. ① 김광운과 도진순은 김구가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축하하는 등 어느 정도 변화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북한 정부 양쪽 모두 인정하지 않는 남북협상 노선을 고수했다고 평가함. ② 서중석과 이신철은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을 수정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조소앙, 안재홍 등이 주장한 민족진영강화론에 호응해 대한민국 정치 참여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고 평가함. ③ 정병준은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을 수정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했지만 이승만 정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 참여로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며 여전히 재야에 남아 평화통일운동을 이어갔을 수도 있다고 평가함) 활동을 재개하면서 지방 순회를 다니기도 했는데, 아마도 이때 김구가 자신의 지방 순회를 도와준 한국독립당 옥구지구 청년단장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저 글귀를 써 준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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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사를 보면 한국독립당 위원장인 김구는 부위원장인 조완구, 조직부장 김학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전라북도 군산특별당부 훈련소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군산으로 내려갔던 것으로 보임. 그 후 전주를 방문하기도 했고. (위 사진은 이때 김구가 한독당 전북도당 간부들과 함께 전주향교를 방문해서 찍은 것. 사진을 보면 중앙 태극기는 잘 보이는데, 왼쪽 깃발은 절반만 보임. 무슨 별이 그려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노경채 교수님의 저서인 『한국독립당 연구』 겉표지 뒷면을 보면 저 깃발의 정체를 알 수 있음. 한독당기임.)

 

김구 글귀.PNG

 

참고로 영상에 나온 문익점의 후손이자 한독당 옥구지구 청년단장이었던 할아버지를 둔 의뢰인 분께서는 1948년 국면에 김구가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지방 순회를 다니다가 군산에 방문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저 글귀를 써 준 것으로 기억하시는데, 

 

정작 1948년 국면에 김구는 5.10총선거나 대한민국 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남북한 정부 양쪽 모두를 반대하는 남북협상 노선을 고집하고 있었음. 그리고 초대 정·부통령 선거는 5.10총선거에서 당선된 제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뤄졌기 때문에 지방 순회를 다닐 일도 없었음. 물론, 5.10총선거의 결과로 구성된 제헌국회 내에서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 출신에다가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지청천 의원과 무소속구락부는 '김구 부통령, 조소앙 국무총리'를 밀고 있었고, 중국 국민당 정부도 김구가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해야 한다고 이승만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김구 본인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아서, 그리고 한국민주당이 아주 격렬하게 반발해서, 사실은 이승만도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우여곡절 끝에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국방부 장관 겸임)으로 결론이 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실시된 초대 부통령 선거에서 김구는 첫 투표에서는 65표, 재투표에서는 62표를 얻었음. 물론, 이시영이 첫 투표에서는 113표, 재투표에서는 133표를 얻어 당선되었음. 그러나 불참을 선언했는데도 이런 득표를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그로부터 대략 한 달 전인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가 서울 시내 다섯 곳에서 통행인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김구는 22.7%인 568표를 얻어 2위를 기록했음. 물론, 1위로 40.9%인 1024표를 얻은 이승만과 격차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4.7%인 118표를 얻어 3위를 기록한 서재필, 3.5%인 89표를 얻어 4위를 기록한 김규식 등과도 격차가 많이 났음.) 아무튼, 김구가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지방 순회를 다녔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으신 거임. 

 

김구가 김익렬에게 보낸 편지 - DogDrip.Net 개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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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내가 김구 선생과 손양원 목사의 인연을 소개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평소 손양원을 높이 평가했던 김구는 자신의 숙소인 경교장에 방문한 손양원에게도 글귀를 써 준 바 있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고. 

 

소아병과 명의 

 

빈곤과 기아를 그대로 두고서 포탄의 위력만 가지고 공산주의를 능히 분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중국에서 큰 실패를 빚어내고 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반대만으로는 공산주의가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릇된 공산주의 소멸 공작은 도리어 공산당 침투의 온상이 되고, 무리한 박해와 착취와 기아와 황폐는 공산주의의 싹을 틔우는 발묘의 비료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구미 각국에서는 공산주의 이념을 반대한다기보다도 폭력과 독재의 수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실현하려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보통 상식이라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인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소아병적 행위 – 서로 돕고 사랑하는 인간성을 무시한 잔인한 수단과 학살 등의 행위를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여수 교회의 손양원 목사의 사적을 듣고서 나는 그분의 종교가다운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이다. 그는 무고한 동포들을 학살한 좌익 소아병자를 완전히 고쳐서 선량한 인간이 되게 하였다.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학살한 좌익 학생에게 온정과 원호의 손을 쥐어 주면서 회유시킴으로써, 다수의 좌익 사람으로 하여금 잔인한 파괴 행동을 버리고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 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감정을 삼가고 이지를 발휘해야 한다. 

 

- 『서울신문』 1949년 4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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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하듯 김구는 자신과 뜻이 통하거나 고마운 이들에게 자신이 쓴 글귀를 선물했는데, 제주4.3사건 당시 경비대 제9연대장이었고 6.25전쟁 당시 한국군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맹활약했던 김익렬의 조카가 증언하기로는 김구가 김익렬에게도 자신의 글귀를 선물했다고 함. 제주4.3사건 당시 경비대 지휘관이었던 김익렬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가며 강경토벌을 주장하던 조병옥 등 미군정 경찰 관계자들에 맞서 온건토벌을 주장하고 민간인 학살을 막으려 노력했던 것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김구가 김익렬에게 써 줬다는 글은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안타깝다.

 

[바다너머4·3]“국회의원도 마다하고 끝까지 군인으로…” < 바다너머 4·3 < 4.3항쟁 < 기사본문 - 제주투데이 (ijejutoday.com)

 

김씨는 창고를 정리하다가 귀한 문서도 발견했다고 한다.

“우리집에서도 나만 알 거야. 큰 광에 쌓여있던 걸 정리하는 데 옛날 문종이가 접혀 있길래 펴보니까 김구 선생의 글인 거야. 그때가 1970년대였는데 김구 선생이라고 하면 ‘극좌다’ 이런 시선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얘기도 못했지. 다시 접어서 놔뒀는데 나도 모르는 새 잃어버렸어.”

그는 매우 아쉬워하며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작은 아버지가 제주도를 위해서 했던 일에 대해 김구 선생이 감사해했던 내용이었다”고 떠올렸다. 김 장군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가족에게도 말을 아꼈다고 한다. 제주4·3은 모두가 쉬쉬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김씨 역시 노무현 정부 들어서며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하고 나서야 가족들과 또 마을사람들에게 삼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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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에 있던 윤석구 체신부 장관도 김구가 군산을 방문했을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고 함. 

 

윤석구는 식민지기 군산에서 한약방인 '영신환'을 운영했으며 조선예수교 장로이기도 했던 인물인데, 사실 그의 정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자금책이었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자금책으로 임명되어 귀국한 후 한약방을 운영하며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냈던 것이지. 해방 이후에는 여운형과 안재홍 등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군산 지부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처음에는 김구 세력이 강했지만 갈수록 이승만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면서 최종적으로는 이승만 세력으로 분류됨) 군산 지부장, 특히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세력이 조직한 비상국민회의 전라북도 대의원, 한국독립당 군산특별당부 위원장 등을 지냈음. 임시정부 시절부터 김구의 지시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산에서 한약방을 운영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김구의 한독당 계열로 활동했으니, 김구의 신임이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겠지. 

 

그는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5.10총선거에 불참했을 때도 무소속으로 전라북도 군산부 선거구에 출마해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이게 김구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함. 믿거나 말거나. 제헌국회에서는 무소속구락부를 이끌었음. 그러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초대 체신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지. 초대 내각은 거의 대부분 이승만 측근들을 포함한 이승만 지지 세력이었고, 설령 한국민주당 소속이더라도 친이승만계 관료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으므로 한국민주당은 자기들이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려 했던 이승만에게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았는데, 무소속구락부를 이끌었던 조봉암과 윤석구는 예외적인 경우였음. 조봉암은 식민지기 공산주의 경력에 해방 이후 중도파로 전향한 인물인데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윤석구는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인데 초대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음. 

 

그러나 1949년 7월 주한미국대사관의 관측에 따르면, 윤석구는 김구의 군산 방문 당시 여러 가지 도움을 준 것이 이승만의 미움을 받아서 체신부 장관직에서 면직된 것이라고 함. 윤석구는 보수 개신교인이자 반공주의자였던 김구와 마찬가지로 조선예수교 장로이면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 피신하면서도 반공강연을 하고 다니던 중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북한군 후퇴시 총살당했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임.

 

 

8개의 댓글

2 일 전

별 상관은 없는 TMI로, 5.10총선거 제주도 지역결과가 4.3사건으로 사라져서 지금은 당선자가 누구인지만 알 수 있다고 하더만

1
2 일 전
@스뵈즈

ㅇㅇ 당시 미군정 아래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5.10총선거가 무효 처리된 곳이 제주였지. 제주4.3사건의 여파로.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 신진세력과 일부 주민들로 이뤄진 제주도인민유격대(무장대)가 제주 민중을 탄압하고 만행을 저질러 온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회 타도,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내세우며 무장봉기를 일으켜 경찰지서, 우익청년단 사무소,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하면서, 

 

그리고 5.10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선거관리사무소를 습격하거나 선관위원들을 공격하는 한편,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고, 주민들에게 투표에 불참하고 입산할 것을 종용하면서

 

제주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를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게 만들었지. 

 

그래서 미국을 공격할 좋은 건수를 잡은 소련과 사실은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준비를 마쳤으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비난하고 있던 북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면서 '2.7구국투쟁'에 이어 5.10선거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남한 좌익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망국단선'을 파탄시킨 '제주도 인민항쟁',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 유격투쟁'이라 평가하면서 추켜세웠고, 

 

반대로 대한민국 정부는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한 것으로 여기며 더욱 강경한 대응으로 나갔지. 철수를 앞둔 미군도 냉전기에 자신들이 설정하려는 세계 질서의 걸림돌로 인식했고.

 

특히, 무장대 지도부가 정말 비판 받아야 하는 점이, 주민들이 선거를 거부하고 입산하도록 종용해 더욱 강경한 대응에 직면하게 만들었으면서 정작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 6인은 일만 벌여 놓은 채 월북했다는 점임. 무책임의 극치. 애초에 고립된 섬에서의 무모한 봉기이기도 했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주도하게 된 신진세력이 낙관적인 정세 판단과 좌경 모험주의로 무장투쟁을 결정한 것이었음. 그것도 남로당 중앙당이나 상급당인 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은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0
2 일 전
@기민주의

선관위 기록 보면서 놀랐던 기억이

근데 그 시절 선거법이 과반 투표율 안되면 무효였나

1
2 일 전
@스뵈즈

제주4.3사건 당시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2개 선거구가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투표율이 나왔고, 제주도선거위원과 국회선거위원회에서 선거의 무효화를 건의했으며, 이에 대해 미 군정장관 딘이 5월 24일자로 북제주군의 선거구 무효화를 선언했으며, 6월 23일 재선거를 치르기로 했지만 결국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다고 하는데,

 

한 번 알아보니 투표율이 과반수에 못 미치면 무효 처리한다는 게 어디 있는 규정인지는 잘 모르겠음. 1948년 3월 17일 미군정청이 5.10총선거를 위해 군정법령 제175호로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 및 공포했는데, 그 내용을 봐도 과반수 미달은 나오지 않더라고. https://www.law.go.kr/법령/국회의원선거법/(00175,19480317)

 

해당 법령 제44조 1항과 2항이 제주4.3사건에 해당되어 북제주군 2개 선거구의 선거를 무효화할 근거로 충분하기는 한데, 과반수 미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네.

 

나도 한 번 알아봐야겠다. 어디에 근거한 내용인지. 일단, 투표율이 과반수 미달이라서, 5할(50%)에 미치지 못해서 선거 무효 처리되었다는 내용은 제주4.3사건을 다룬 여러 논문이나 서적에 나와 있기는 함.

0
2 일 전
@스뵈즈

참고로 제주4.3사건 당시 무장대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자면,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 6인이 월북한 이유가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아시타비, 내로남불하기까지 했다고 봐야겠지.

 

1948년 남한에서 5.10총선거가 치러진 후인 6월 북한은 4월 남북협상(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의미함)에 참여했던 남한 인사들에게 제2차 남북협상(제2차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 참여할 것을 제의했지만, 김구(한국독립당)와 김규식(민족자주연맹) 등 대부분의 우익 세력은 참여를 거부했음. 남한에 새로운 정부 수립이 확정된 상황에서 북한이 제의한 제2차 남북협상은 북한에 또 다른 분단정부를 세우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임.

 

이에 따라서 제2차 남북협상에는 남한 정치인들 중에 홍명희(민주독립당), 이극로(조선건민회)를 비롯한 소수의 중도우파 정치인과 남한의 중도좌파 세력(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민중동맹, 근로대중당, 민주한독당, 신진당 등), 그리고 좌파 세력(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 정당 및 사회단체들인 남조선노동당, 조선인민공화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등)만이 참여했음.

 

이들이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해주에서 열린 회의에앗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총선거를 통해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남한에서는 공개 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음.

 

남한에서는 남조선노동당과 일부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해서 만든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선거지도위원회'가 7월 중순부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할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예비선거'에 돌입했는데, 이를 통해 '남조선 대표자' 1080명을 선출했고, 이들이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 모여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본회의를 개최해 대회 마지막 날 북한의 8.25총선거에 맞춰 대표자들이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음. 그 결과로 조선최고인민회의를 구성했고, 헌법을 제정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지.

 

제주의 무장대도 5.10단선단정반대투쟁에 이어 8.25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투쟁에 돌입했는데, 무장대 지도부 6인이 제주도 대의원으로서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한 것이었지. 여기서 무장대 총책인 김달삼이 제주도 봉기 상황과 선거 진행 상황에 대한 특별보고를 해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제주4.3사건은 '통일을 위한 제주도 인민의 구국투쟁'으로 열렬히 선전되었음.

 

북한은 이미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준비를 끝냈으면서 명분을 쌓기 위해 남한이 먼저 5.10총선거를 실시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기다리며 남한에 책임을 전가했고, 남한 좌익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한다면서 이른바 '2.7구국투쟁'이나 5.10선거 반대투쟁 등을 전개하며 총파업, 봉화 시위, 관공서 습격, 입후보자와 선거 관계자들에 대한 테러, 교량과 철도 파괴, 통신 방해, 각종 시설 방화와 같은 대중투쟁 및 폭력투쟁 노선으로 5.10총선거를 저지하려 했지만 정작 또 다른 분단정부인 북한 정부 수립 과정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를 지지했음. 그야말로 아시타비, 내로남불 그 자체임.

 

이와 반면에 김구와 김규식 등은 6월 북한이 제의한 제2차 남북협상을 제1차 남북협상에서의 약속 위반이자 또 다른 분단정부 수립 과정이라고 비판하면서 거부했으며, 8월 북한 정부 수립 과정인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대해서도 비판했기 때문에 북한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한 일부 중도파 정당들이 김구와 김규식 등을 비난하기도 했음. 남한 좌익 세력도 마찬가지였고.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박헌영도 김구와 김규식 등을 공격했지. 김구와 김규식 등이 이승만 정부 타도와 주한미군 철수,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 대열에서 이탈해 북한 정부 수립 과정을 비방하고 있다면서. 그로부터 대략 10개월 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 허헌도 김구와 김규식 등을 더 강도 높게 공격했지. 이때도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 등에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참여할 것을 제의했지만, 김구와 김규식 등은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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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 전

한독당 해방 전에는 태극기 그대로 썼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해방 후에는 다른 걸 썼구나

1
2 일 전
@김팽달

애초에 저 시기 태극기도안이 좀 제각각이었다 알고있음

1
2 일 전
@김팽달

ㅇㅇ 태극기 도안이 제각각이었던 시절이라 그랬을 거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러 가지 태극기가 쓰이니까 국기보양회라는 단체가 국기의 도식과 규격을 통일해달라고 건의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기제정위원회가 출범한 시점이 1949년 1월임. 문교부가 국시 2호로 국기를 공포한 건 10월 15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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