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이야기

소설: 테이블에 남은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며


제목: 

테이블에 남은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며 
[주: 과학 저널에 실린 사설의 형식을 빌린 글입니다. 시대 배경은 대충 2060 년대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초록: 

메타 휴먼들이 과학을 주도하는 시대에 인간이 할 일은 메타 과학이다.

창조적인 과학 연구 결과가 네이처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지 25년이 지난 이 시점은, "최첨단 과학 연구가 이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 지금, 인간 과학자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적절한 시기이다.

 

우리 저널의 독자들은 아마 이 저널에 실리던 논문이 해당 연구를 처음으로 수행한 과학자들에 의해 쓰여졌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메타 휴먼들이 과학 연구를 주도하기 시작한 뒤, 그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DNT (digital neural transfer; 디지털 신경망 교환법) 에 의해 나누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과학 저널이란 그들이 '인간의 언어로 굳이 번역하는 수고를 들여' 2차 발표를 하는 곳이 되었다.

 

DNT 가 없는 우리 인간은 메타 휴먼들의 발견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들이 더욱 발전된 과학 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발명한 실험 장비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반면에 메타 휴먼들은 그들의 DNT 를 더욱 발전시켜나갔고, 그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인간의 과학 저널들은 메타 휴먼들이 일반인들의 과학 상식 (자기들 기준에서) 을 배양시켜주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것도 잠시, 메타 휴먼들이 더욱 발전해나간 뒤에는 인간 기준에서 천재라고 일컬을 만한 과학자들도 메타 휴먼들이 번역해 준 논문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메타 휴먼들이 발전시킨 과학적 발견은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 대가는 비쌌다. 인류는 그들이 더 이상은 과학에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과학자들의 일부는 그 분야를 떠나게 되었다. 남아있는 자들도 전통적 의미의 과학을 수행할 수는 없었고, hermeneutics, 즉 메타 휴먼의 과학적 발견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문서 Hermeneutics' 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아직 메타 휴먼들이 인간을 교육하려는 의지가 남아있던 시절에 그들이 남겨놓은 방대한 양의 문서 (메타 휴먼 기준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썼지만 인간은 이해하기 힘든) 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들을 해독하는 일은 고문서학과는 매우 달랐지만, 그래도 진척은 있다. 최근의 연구는 10년 전에 메타 휴먼들이 남겨놓은 유전학에 대한 문서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메타 휴먼들이 개발한 실험 도구들 역시 '물건 Hermeneutics' 분야로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메타 휴먼들이 개발한 이 물건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물론 메타 휴먼들과 경쟁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 물건들의 동작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메타 휴먼들이 개발한 나노 전자 기기들을 결정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나노 스케일의 합성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는 메타 휴먼들이 만든 연구소를 연구하는 것이다. 메타 휴먼들이 고비 사막에 설치한 Exa 입자 가속기가 뉴트리노를 어떻게 다루는 지가 현재 가장 핫한 연구 주제이다. (휴대용 뉴트리노 검출기 역시 물론 메타 휴먼이 만들었기 때문에 동작 원리를 아직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런 일이 가지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연구를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미국 원주민들이 굳이 스스로 청동기 주조 기술을 개발해보겠다고 덤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이다. 우리가 만약 메타 휴먼과 경쟁하는 관계라면 이런 비판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와 메타 휴먼이 경쟁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 덜 진보된 기술 문명이 더 진보된 기술 문명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 강제 흡수나 멸종의 위기는 이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아직 인간의 두뇌를 메타 휴먼의 두뇌로 개량하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스기모토 유전 처리는 배아가 신경망을 분화시키기 전에 행해져야만 태어난 아이가 DNT 에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기모토 유전 처리 없이 태어난 인간이  메타 휴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스기모토 유전 처리를 행한 부모는 힘든 결정을 해야만 한다.

 

태어난 아이에게 DNT 접속을 허락해서 메타 휴먼 문화를 접촉할 수 있게 하던지 (이 경우에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자신들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는 메타 휴먼이 되는 것을 겪어야만 한다), 유년 시절에 DNT 접속을 허락하지 않고 보통의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메타 휴먼 입장에서는 Kaspar Hauser 의 케이스에 비견할만한 인권의 박탈이다.) [주: Kaspar Hauser 는 19세기에 있었던 유명한 어린이 인권 박탈 사례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스기모토 유전 처리 자체를 하지 않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인류 문명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전망이며, 정상적인 문명에는 과학적 전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Hermeneutics 는 그 대상이 자연계가 아니라 메타 휴먼의 지식이라는 점만 다를 뿐,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통적 과학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인류가 가진 지식의 총량을 증가시켜 나갈 것이다. 또한 인간 과학자들은 메타 휴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지닌 장점 때문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일단 태어난 사람이 점진적으로 똑똑해져서 마침내 메타 휴먼과 비견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추게 되는 새로운 지능 향상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런 향상법이 발견된다면 우리 인류와 메타 휴먼 사이의 갭을 메꿀 수 있겠지만, 메타 휴먼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능성 단 하나 만으로도 인류 과학이 유지될 정당성은 충분하다.

 

우리는 메타 휴먼들이 이루어낸 성취에 겁먹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메타 휴먼을 만들어 낸 원천 기술이 인류의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하며, 그 당시만 해도 메타 휴먼들이 우리보다 더 똑똑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1개의 댓글

메타 휴먼이 태아에게 스기모토 유전 처리해서 만들어지는 거면 메타 휴먼도 인류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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